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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권의 어두운 밤”, 백인덕 시인과의 인터뷰

홍수연 시인 | 입력 : 2021/03/15 [09:44] | 조회수 : 408

문단소식북극권의 어두운 밤”, 백인덕 시인과의 인터뷰

 

 

내가 읽는 이 시는 눈 빨간 여우와 / 굶어 죽은 그의 새끼들을 위한 것이다 / 다른 늑대에게 잡아먹힌 목덜미 흰 / 새끼의 어미 늑대를 위한 노래다 // 시린 뼈 하나 입에 물고 / 들짐승처럼 짖는 거다, 우는 거다 / 차가운 말씀이 온 거리를 단단하게 결박할 때까지 / 몸속 뼈를 하나씩 추려내는 거다

- 시인의 시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백인덕 시인 © 시인뉴스 포엠

 

 

 

언젠가 시인과의 통화에서 시인은 모든 시인들을 일컬어 또라이라고 하였다. 나는 박장대소하며 동의하고 말았다. 또라이, 멋지지 않은가! 나는 또라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또라이는 자신만의 철학으로 자신만의 신념대로 올곧게 사는 이가 또라이다. 미쳐 돌아가는 세상에서 함께 미치지 않아서 또라이다. 순수가 덕목이 아닌 시대에 순수하고 착해서 또라이다. 또라이는 춤을 잘 춘다. 또라이는 노래를 잘한다. 무당이 신명나게 칼춤 추며 원혼을 위로하듯 시인에게 칼은 펜이다. 또라이인 시인은 밤낮으로 펜을 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신명난 굿판을 벌인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세상과, 자신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스물 네 시간 그러고 있다. 필시 세상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물러날 터이다. 또라이인 시인이 자신과 또는 세상과 벌인 한 판 혈투, 용호쌍박, 차가운 눈 속에서 피워낸 샛붉은 동백, 그 동백나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습작생이었던 학부시절부터 무뎌지는 정신을 벼리기 위해 가끔 꺼내 보는 김수영 전집 2 산문의 일기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누가 무엇이라 비웃든 나는 나의 길을 가야만 한다.” 구태여 분석하자면 지나친 자가 공감의 표출이나 자기애의 극단이라 할 수도 있지만, 아마 김수영 시인도 보들레르의 자기는 자기의 사형집행인이고 사형수다라는 말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뭐가 부끄럽냐는 후배의 질문 앞에 선 새벽, 난무하는 거짓 포즈들 앞에서 그저 부끄럽고 죄스럽다. 그냥 그렇다는 것, 나는 결코 사과에 청산가리를 주사하지는 않을 것이다.(백인덕)

 

 

 

 

대표시

사랑에게

 

약국을 지나고 세탁소를 지나고 주인이 졸고 있는 슈퍼를 지

나 비디오 가게를 지나고 머리방을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서

아이들이 버린 놀이터를 지나 네거리 신호등 앞

사랑아, 네게로 가는 길은 규칙이 없다.

놀이터를 지나고 문구점을 지나고 푸른 등 머리방을 지나고

비디오 가게를 지나 주인이 졸고 있는 슈퍼를 지나고 세탁소

를 지나고 약국을 지나 영원히……

 

- 시집한밤의 못질중에서

 

 

 

 

오래된 약()

 

비 오다 잠깐 갠 틈

책장 사이 수북한 먼지를 털자

어디다 쓰는지 알 수 없는

알약 몇 개 떨어진다.

 

언제,

어디가 아팠던가? 무심한

손길이 쓰레기통 뚜껑을 열자

스멀대며 퍼지는 통증 한줄기.

 

약은 몸에 버려야 제격,

마른침으로 헌 약을 삼켜버린다.

그 약에 맞춰 몹쓸 병이나 키우면

또 한 계절이 붉게 스러지리.

 

- 시집오래된 약중에서

 

 

 

 

 

짐작의 우주(宇宙)

 

여름밤 하루살이는

제 새끼의 날갯짓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때의 별빛 한없이 쏟아지는 지금의 창가

 

줄기 끝마다 한창인 고추 흰 꽃들이

붉은 고추를 보지 못하듯,

냇가 맑은 조약돌마저 제 모래 위에

한나절 해바라기 할 수 없듯이,

나는 언제나 그대 뒤를 보지 못한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

우주는 온통 사건들로 메워지지만

재빠른 그대 칼날은 내 옆구리를 비껴가고

내 언어의 그물은 바람의 뒤축만 포획할 뿐

 

여름밤 청개구리들은

제 새끼들의 연못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지금 절정의 별빛 그때의 보석 아니듯이,

 

나는 그대의 그림자에 뒤엉키고

발목이 시려

또 하나의 사건으로 절름댔을 뿐,

그대는 항상 내 배면을 보지 못한다.

 

- 시집짐작의 우주중에서

 

 

 

 

: 안녕하세요. 시인님.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반갑습니다. 기침은 좀 어떠하신지요? 건강하시지요?

 

: 그럭저럭 입니다. 두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는 대사증후군으로 엄청나게 불어난 뱃살이 문제고 이건 야식을 먹지 않으면 되는데, 그러자면 밤에 원고 쓰는 습관을 바꿔야 하고 다른 하나는 천식으로 고생인데 요것도 담배를 끊고 좀 걸으면 되는데 어쨌든 습관, 아니 아예 직업을 바꿔야 하나, 괜한 고민에 없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그럭저럭 잘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웃음)

 

 

 

 

인생은 짧고/일회용품은 길다

공익광고협의회 지음

각색: 백인덕

 

자간字間마다 도끼날을 숨긴,

바닥에 면도날을 세운 채 내미는 손,

양 볼 보조개 생매장 구멍으로 미소 짓는,

오오, 사랑스럽게 미래까지 협박하는

내 자랑스러운 대한미국의 잔인한 배려,

혹은 뉴욕자본의 길음동식 포즈여!

 

주님께 경배가 다한 이 새벽,

나는 고쳐 쓰련다.

아무렴, 인생은 길고, 술자리는 짧다.

술자리는 길고, 상념은 짧다.

상념은 길고, 존재는 짧다.

존재는 길고, 염려는 짧다.

-예술은 어디 가로등 아래 울고 있나?

술이 약한 예술은 외설이다. 예술의 바깥,

능구렁이 혓바닥만 옛집에 남긴 어설픈 이주,

예술은 없고, 인생만 무진장인 세상.

 

밤낮 없는 협박이 나를 살게 하니

새벽에는 익스트림 데블로부터 은하를 구출하는 데몬,

아침에는 엘리베이터에 끼어 죽고, 하수구에 빠져 죽은

슬픈 영혼을 위한 제사장이었다가,

점심때는 급식법 개정을 외치는 투사였다가,

오후에는 백일몽 수호 전국연합회장,

해가 지면 겨우 글빚, 말빚, 돈빚, 빚더미에 올라앉는

어두운 밤, 모든 염려가 나다.

 

사랑은 지속하기 위해 발생하지 않고,

직장은 죽도록 다녀야 하는 곳이 아니고,

수명보다는 행복이라며

쓸쓸히 리모컨을 누른다.

인생은 짧고/일회용품은 길다

이 모든 가르침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싶다.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인생은 짧고 / 일회용품은 길다하루하루는 긴 것 같은데 1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고 맙니다. 우주의 시간과 비교하였을 때 우리 인간들은 일회용품이겠죠. 이 시를 쓸 당시의 시인님께서는 여러 가지 감당해야 할 일들로 피로에 지친 나날을 보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 , 그렇습니다. 선친 슬하에서 35년을 있다가 겨우 독립해서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시인으로 불투명한 전망, 대학 강사로서 불안정한 미래, 사람 특히 이성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우울감 등이 겹쳐졌던 시기입니다. 단 위 작품은 전에 광고회사에 다닐 때부터 갖고 있던 광고’, 유혹하는 매스 미디어에 대한 반감,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공익광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협박과 길들이기에 대한 오랜 반감을 표출한 것일 뿐, 실제로 제 신병이나 처지를 심각하게 비관하거나 염려한 것은 아닙니다. 전 엄살이 극심한 편이라 간혹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산업 구조를 바꾸면 되는데, 일회용품 쓰지 말라 하는 저 광고가 그 상품의 제조사에서 나오고, 뭐 그런 식으로 소비자뿐만 아니라 늘 개인이 희생양이 되는 체계에 그냥 가래침 한 번 뱉은 겁니다.

 

 

세밑, 어설픈 일기

 

슬슬 허기가 일면

창밖은 한창 눈이거나 비,

읽던 책은 겨우 서문이거나

뒤표지 정도,

끝물의 취기,

시작되는 한기,

오늘이 며칠일까?

흐린 눈 비비고 바라보면

어김없이 월말이거나 월초, 이미

약속은 넘겼거나 무의미해졌기 일쑤.

슬슬 허기가 생 상처를 건드리면

아득한 정신에 밀리는 마른 살점들,

때때로 서로를 보듬고 흩어져 날려

빈방에 헛것,

취한 정신의 빈 몸,

빈방 빈 몸에 딱지 앉은 상처,

점지點指를 확인한다.

참 가려운 것들,

더욱 가벼운 것들,

끝끝내 가여운 것들만

한 무더기 가라앉힌다.

어쩌면 시도 때도 없는 이 허기를

여백餘白의 시보다

시간보다

더 사랑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끝내 허기로 밀고 가는 끝물의 생.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끝내 허기로 밀고 가는 끝물의 생어떤 허기가 시인님으로 하여금 시인의 길을 걷게 하였을까요?

: ‘가난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허기는 신체적 감각인 배고픔을 그대로 지시하지는 않습니다. , ‘좌절된 욕망쯤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보다 원초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고 1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모친을 사고로 잃었는데 평생의 트라우마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지인들은 모태 회귀 본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저도 허기라는 어휘를 사용할 때는 주로 이성이 아니라 충동에 사로잡히는 순간이라는 의미에서 타나토스분위기를 내려는 의도를 갖습니다.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따라 추동하는 생 정도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년의 봄

 

봄은 몇 개의 이니셜로 왔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은 졸업장을 말아쥐고 온통

빨갛고 노란 꽃다발에 묻혀 떠나갔다.

, 후레쉬가 터질 때마다 아는 듯한

그러나 영원히 모를 표정들이 엉망으로 꽃을 피웠다.

희망을 위하여 우리들은 끝까지 슬픔에 젖지 않아요.’

뚝심 있게 술잔을 기울였던 무위의 밤들이

사방에서 터지는 불빛 속에 은밀히 묻어났지만

어디로 갑니까

아무도 묻지 않았지만

벌써 흙바람이 불기 시작한 마른 봄날 길들은

어두워가고 잔설을 피해 계단을 내려서며 우리들은

각자의 끝을 가늠할 수 있었다.

넘겨받은 꽃 몇 송이가 뻣뻣하게 마르기도 전

나는 푸른 견장을 달고 돌아다녔다.

 

- 1991월간현대시학등단작품

 

 

 

서시(序詩)

 

 

차표를 찢으며 사람 없는

바람조차 없는 길 건너 얼굴 바꾸며 돌아가는

입간판을 봅니다. 가득한 슬픔으로도 내내 제자리를

쉬지 않고 돌아가는 입간판 하나만큼도 넉넉해질 수 없는

세월이군요. 멀리서 무너지는 빙벽의 소리를

듣습니다. 겨우내 위태를 즐기며 지나온 길들이지만

아예 흔적조차 없을 시간이라 믿으며 살았고 죽어

왔습니다. 차표를 바지 주머니 깊이 밀어 넣으며

당신이 늘 찢어진 반대편에 위치하는 것은

내 그리움이 아직도 좁은 물길을 따라 흐르는 탓이리라

자책하며 이렇게 흐린 봄날 저녁

옆자리 중년 사내의 그늘진 표정 아래 몸 숨깁니다.

오늘도 나는 정체불명일 따름입니다.

 

- 1991월간현대시학등단작품

 

 

 

 

: 1991년 월간현대시학성년의 봄8으로 등단하셨습니다. 잘 기억나지 않으시겠지만, 등단 소식을 접했을 때의 감회를 여쭙습니다.

 

: 기억이 또렷합니다. 소식은 모교의 제 은사이신 고() 이승훈 시인의 학교연구실에서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으로 인사동(정확하게는 관철동) ‘현대시학사를 찾아가 추천해 주신 정진규, 박상배 두 선생님을 뵈었고, 그렇게 세 분 선생님과 몇몇 선배 시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밥과 술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돌이켜보니, 정진규 선생님이 연말에 송년회 자리에서 참석한 시인들 앞에서 신인으로 소개했을 때가 오히려 실제 등단 소식을 접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느낌 그대로를 쓰자면, ‘이제 시작이구나하는 정도였습니다. 등단부터 하려고 군대 입대도 미루고 석사를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결국 18개월 방위도 끝나고 이십 대 후반에서야 등단하게 되었는데 뭔 떨림이 있었을까 싶습니다.

 

 

 

오늘의 뉴스

 

어째,

퍼붓는다는 빗줄기 대신

참새 한 마리,

창밖이 소란스러워 무거운 아침.

사선斜線으로 올려볼 수밖에 없는 하늘

오늘의 심기心氣를 살피는데

,

얼마나 긴 세월을 견뎠는지 먼지 알갱이 하나

우박인 듯 이마에 떨어진다. 문득 걸레 같은 방

천청에서 흠칫 살 밑, 공포를 일깨운다.

머리맡, 발밑, 책상 아래 흩어졌던 잡다한

책들 가지런히 그 두께와 무게에 맞춰

정리하며 뉴스를 듣는다.

-24살 아들 뭍에 빠져 허우적대자,

두 살 위 형 급하게 급류에 뛰어들고,

두 아들을 위해 본능적으로 뛰어든 어머니까지,

참 비극입니다 -200781일 삼척에서.

, 짹 참새는 어느새 한 떼로 늘어 시끄러운데

나는 반성할 그 무엇이 없다.

초월적으로 비루했고,

내재적으로 빈곤했으나

수입이 없으니 입맛만 살아난다.

한 일 년쯤, 아니 영원히 썩은 책 끓여먹고, 지져먹고,

구워먹고, 튀겨먹고, 귀찮으면 닐로 씹어 먹으며

살아남아야 하리라. 어처구니없는 희생.

그 단단한 벽의 질감을 느끼기 위해

아침, 점심, 저녁,

쉼 없이 비극적 뉴스를 되뇌인다.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나의 비극이 너의 비극이 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보다 내 불행은 항상 더 크게 느껴지게 마련이니까요. 살아남아야 하리라. 어처구니없는 희생. / 그 단단한 벽의 질감을 느끼기 위해 / 아침, 점심, 저녁, / 쉼 없이 비극적 뉴스를 되뇌인다.”비극적인 뉴스가 사라질 수 있는 날은 올까요?

 

: 제 답은 부정입니다. 결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인류에게 비극이 사라지는 날은 올 수도 있지만 비극적인 뉴스가 사라지는 날은 결단코 오지 않을 겁니다. 상품 중에서도 희소성이 가장 떨어지고, 보관 및 관리할 필요가 전혀 없는 싸구려 중의 싸구려가 바로 뉴스인데 이 뉴스는 선정성을 기준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폭력과 비극이라는 주요 메뉴를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현실에서 우리가 비극적 사건들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사회 구조를 혁신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와 무관하게 시시콜콜하기까지 한 비극적 사건을 전시하는 뉴스는 이번 세기 내내 지속 확장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뉴스에 감정이입 하는 건 말 그대로 감정낭비입니다. 감정도 헤프게 쓰면 꼭 써야 할 순간에 텅 비게 된다는 걸 저보다 더 잘 아실 거라 믿습니다.

 

 

시대착오적 백인덕

 

반 대머리 머리를 떼 내고 두부 한 모를 얹었다.

어떤 이의 망치는 강한 반발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부술 대가리는 지천에 널렸으므로

겨우 총채질이나 하는 시인들에게

쉽게 갈라지고 흠집 나는 이 머리를 바친다.

 

울렁대는 가슴을 헐어내고 고탄력 고무판을 끼웠다.

어떤 이의 혀는 쉴 새 없이 독침을 쏘아대지만

가장 순한 말에도 시들어버리는 가슴이야 새가슴이므로

겨우 가래침이나 뱉는 시인들에게

잘 튀지도 찌그러지지도 않는 이 가슴을 바친다.

 

온종일 비틀대는 두 다리를 잘라내고 연탄집게를 박았다.

어떤 이는 폭을, 어떤 이는 보행의 속도를 말하지만

그들과 춤출 다리는 세상 저녁마다 가득하므로

대낮부터 괜한 발길질에 몰두하는 시인들에게

아무리 조여도 헐겁고 삐걱대는 이 다리를 바친다.

 

시대에게, 아니 시대착오적인 시인들에게 아니, 아니

시대착오적인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

나를 바친다

- 누가 받아줄려나?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시인님의생활시를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시대착오적인 시는 어떤 시를 말함일까요?

 

: 먼저, ‘생활시라는 규정이 재밌네요. 자학시라고 스스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생활의 이면에 배인 낭패감을 표현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대착오적인 시를 말하려면 시대 정신에 대해 말해야 하고, 그것의 정당성과 긴급성 혹은 시대적인 시를 써야 하는 시인의 사명 등에 대해서도 말해야 하고, 하여간 여러 층위를 두루 거쳐야 하는데, 그럴 엄두는 나지 않네요. 전 이 시에서 제가 쓰는 시가 시대착오적이라는 말만 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작(詩作) 행위가 존재를 실존으로 내몬다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사실 시는 최대한 잘 포장된 것, 김종삼 시인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미학적인 게 좋지요. 시대에 버림받은 제가 무슨 시대착오를 논하겠습니까. 이 시를 쓸 무렵에는 어떻게든 방송에 한 번 노출된 시가 무조건 좋은 시였고, 오래된 사람들이 하는 잡설이 옳은 시론이었으니,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몸살, 약에 취하다

 

그제는 슬펐고

어제는 술 펐고

오늘은 술기운, 슬픔에 겨워

햇살 끝에 하롱대는 먼지 알갱이처럼 가벼워진

맘과 몸과 주머니 속 불안을 되살리며

오오, 텁텁한 바이브레이션으로 불러본다.

-내게 어머니가 있었다면,

그녀는 언 땅 깊숙이 제 머리채를 묻었으리.

나는 빚어지면서 잘못된 우주,

폭발하거나

응결하거나

끝은 매 한가지, 차거워진다는 것.

아무도 더러운 운명에 제 흰 손을 얹지 않으리라.

몸을 버리는 술기운,

창끝으로 말려 올라간 햇살이 아쉬워 다시

죄어드는 목청으로 애써 불러본다.

-내게 애인이 있었다면

그녀는 동전 몇 닢을 모으고 모아

어리숙한 눈빛으로 국어사전을 선물하리라.

찬연히 빛나는 칼이거나

진한 검정의 피스톨을,

나는 다져질수록 잘못된 우주,

발사되거나

지연되거나

가까워질 수 없다는 끝은 매 한 가지.

 

말뿐인 사랑이 돈뿐인 순간을 초월하지 못하는

세밑,

세금 한 푼 못낸 세월의 그늘에서

배가 고프다.

따뜻한 해장국이 끓는 천국을

그늘 아래 줄 서지 말고 갈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온 영혼을 팔리라.

-제길, 나의 메피스토펠릭스는 어디서 자빠져 있나?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쉴 새 없이 차량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학교 앞 포장마차, 식어 가는 떡볶이와 어묵을

들어가고 나오는 차량처럼 번갈아 씹으며

자정을 향한 늦은 밤, 이십여 년 전의

그때처럼 난 혼자 되뇌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몇 몇 연구실의 불빛들은 아직 살아있지만

더 환하게 불 밝힌 건 대학병원 영안실,

가지에서 막 떨어지려는 꽃잎들이

내 흉한 어깨를 비스듬히 내려 보고 있다.

병원을 다녀야만 했을 시간을, 나는

풀리지 않는 숙취와 함께 학교를 다녔다.

그러므로 잘못 다녔다는 것이다. 거기

휠덜린도 있었고, 라깡과 아아, 헤겔도 있었지만

정작 내 손으로 꾸민 작은 정원은 없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미 다 식어버린 어묵 꼬치를 간장에 찍으며

내게 정원이 있었다면 어떤 나무와 풀,

가벼운 돌 몇 개가 어떻게 놓였을지

꿈을 꾼다. 자정이 다 된 늦은 밤,

백일몽처럼 길을 찾는다. 자꾸 발길을 느리게

하는 잔바람,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이 한마디로 이제는 시를 버려야겠다.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시인님은 시인님의 삶을 사랑하시나요? 사랑하신다면, 혹은 사랑하지 못하신다면 그 연유는 무엇일까요?

 

: 인터뷰어, 아니 홍시인님 질문에 자꾸 미꾸라지처럼 꿈틀대는 제 모습이 지금 눈앞에 그려집니다. 태어난 마당에 삶을 사랑하지 않을재간이 있나요. 다만, 그 방식이 적절했나 늘 고민하는 거지요.

이 작품은 실제로 병원과 제가 소속된 단과대학이 동시에 올려 보이는 지점에서 술 없이 떡볶이와 어묵을 번갈아 씹으며 씹어본 당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시도 학문도 지지부진하고 그때도 지금처럼 기침만 흥건한 시간이라 약간 비감하게 만약을 사용해서 시를 안 쓰고 연구만 했다면 좀 낳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겁니다. 그냥 재미 삼아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라고 질문하고 그 대답으로 온갖 소유물이나 과정의 결절점을 떠올리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저의 7권의 시집은 제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분의 언어로 표현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미심장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 삶을 어떤 방향으로만 몰고 가는(온갖 지위와 소유물과 유명세 등) 행태가 싫어 써 본 시입니다.

 

 

 

단풍나무 어두운 안개 속에서

 

기어이

텃밭 빗소리에 흐린 오후는 끝장나고

마지막 담배 한 개비처럼

힘겹고 흐린 숨결을 허공에 흩을 때,

단풍나무 어두운 안개 속에서

뜨거운 태를 잘랐던 손이

가만히 두 발목을 움켜쥔다.

황국黃菊 몇 송이는 그새 시들었는가!

황혼녘 작은 그림자로 그 앞에 서면

응답도 호명도 없었던 이십여 년의

목이 간지러워,

겨우 피가래라도 뱉고 싶었지만

곯은 내장 같은 밤은 오히려 뜨거워

활활, 불처럼 살고 싶었다.

타버리고 싶었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자기기만, 거울 속 를 이해한다는

완전한 착각일 뿐이다.

얼자란 피들 사이 빗방울은 서서히 고였다가

맹목의 순수함으로 집중한다.

가는 파이프 관을 지나

콘크리트 바닥에 잠시 스몄다가

그들은 곧 하염없는 순한 구름이 되리라.

이 간단한 진리를 적용하기 위해

내 온몸의 피가 결코 응결하지 않기를

몸 안이나 밖에서나

끝내 흐름을 멈추지 말길 수 없이 빌고

다그쳤던 밤들.

다시 보는 어둠 속

서쪽 창밖, 철제 크레인 몇이 사라졌다.

그래도 길은 아직 남았으니

부패하거나

해체하거나

흩어져 날릴 뿐.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 꿈이란 그런 것이다 / 자기기만, 거울 속 를 이해한다는 / 완전한 착각일 뿐이다.”이 구절의 의미를 여쭙습니다.

 

: 만약 이 구절만 분리한다면, ‘’, ‘기만’, ‘거울’, ‘착각과 같은 어휘들이 남겠지요. 이 어휘들이 문장의 요소에 부합하거나 비틀리면서 맺는 관계를 생각하면 흐릿하게나마 의미의 실루엣이 보이지 않을까요. 제 방식으로 풀이하면, 꿈은 자기가 이상화한 가상만을 좇기 때문에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상한 꿈이란 내가 고상하다고 먼저 자기를 이상화한 착각의 기만적 결과라는 것이지요. 사실 순수한 시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욕망이 제로 상태라서 순수한 것도 아니고, 법이나 도덕 없이 살 수 있는 인격자라서 순수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들이 순수하다고 근거 없이 이상화해서 그 거울상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만약 순수한 시인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스스로 이상화하지 않는 말 그대로 무념무상의 존재인데 이런 분들은 현실에선 너무 멀리 계신 분들이 아닐까요. 시인은 정말 이 시대에 이 사회에서 가장 순수하지도 않고 별 볼 일 없으면서 자기 현시에 빠진 존재가 아닐까요.

 

 

 

-개강 날 아침에

 

바람을 타고

사선斜線으로 유리창을 그어대는

여린 빗줄기.

늦여름의 월요일 아침,

흐린 조각 거울 앞에서

쥐색 넥타이를 단단히 조이다

, 사선斜線에 매달린

마흔 몇, 바람 든 영혼을 생각한다.

슬픔은 생각에만 깃들고 좀체

몸 구석구석 배어들지 않는다.

슬픔의 밥을 먹고,

슬픔의 독한 술을 마시고,

슬픔의 책 서걱대는 갈피를 넘기고,

슬픔의 노래 뼈 마디마디를 분질러도

생각 속에 맴도는 슬픔은 불붙지 않는다.

, 벙어리의 아침이여!

거세어지는 바람을 타고

방향을 놓친 빗줄기는 서서히 미쳐간다.

그만 죄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숭숭 바람 든 영혼을 서늘한

아침으로 풀어놓는다.

미치도록 미치고 싶은

늦여름의 아침

한때.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시인님께서는 어떤 강의를 하고 계신지요?

 

: 지금은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에서 학부 글쓰기라는 과목을 맡고 있습니다. 시간강사법에 해당하는 말 그대로 강사입니다. 강의의 의미는 늘 제가 어딘가 소속되었다는 안정감 때문에 시에 자주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광고회사 등에서 직장생활 5년 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사회생활이 없습니다. 시간강사만 이십 년째입니다.

 

 

 

사랑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리드리히 니체)

 

무심코

창가에 놓아둔 유리잔

단일했던 방이

수십 겹의 비늘로

서로를 쏘고 있다.

 

무심히

당겼던 문 경첩이 삐걱

죄 없이 걸려버렸을 때

고비의 낙오자처럼

바람 속에 널 죽이고 싶었다.

강철의 모래에 매장하고

스스로 순장당하고 싶었다.

 

무작정

침입이 허락된 계곡으로 너는

나비처럼 사뿐 한 걸음뿐이었을지라도

직선을 모르는 나비처럼

되돌아갈 수 없으리니

 

죽여 버려라.

기다림이 너의 흰 목을 다 죄이기 전에

 

,

,

생각이 많은 밤엔 헛된

죽음도 많지만, 헛되고 헛되어라.

무른 생각 밖에서 한 겹

 

-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중에서

 

 

 

: 부제로 적으신 프리드리히 니체의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말씀 같습니다. 제가 아름답지 못한 까닭을 잘 알 것 같아요.

 

: 무언가 굉장히 고무되었던 시점에 이 작품을 쓴 것 같은데, 구체적인 계기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표면이 어디 있고 이면이 어디 있나, 분별심은 어리석어 야단치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합니다.모든 아포리아가 그렇지만 제가 니체의 말을 이해했을 리도 없고, 다만 이면이 표면에 착 달라붙은 기아(饑餓)의 꼴인 한 사랑에 관한 시들에 분개했었나 봅니다. 물론 제 시도 실패했을 뿐이지만요.

 

백인덕 시인의 시집(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은 오로지 시를 향한 집념만으로 스스로 제 뼈를 갉아가며 혁명을 꿈꿔 온 시인이 부르는 절망의 노래들로 가득하다. 영원이라는 백일몽의 길을 찾아 나선 시인의 영혼은 그토록 꿈꾸던 영원에 가 닿지 못하고 매 순간 스스로를 사선死線에 세운다. 좌초한 혁명의 끝에서 그는 나와 내 것이라 믿었던 언어와 / 그 수레에 함부로 실었던 엉망인 노래와 함께 시도 때도 없이 상처를 건드리는 허기로 자신을 밀고 가는 끝물의 생을 떠올린다. 지금껏 저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어온 시와 현학은, ‘라깡이 아니라 새우깡인 삶 속에서 오히려 그를 더 깊은 슬픔과 허기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절망 가득 찬 목소리로 그는 난 세계가 뱉어버린 오물. / 난 이 세계를 사랑할 의무가 없다.”고 외친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시인의 영혼은 기쁘게 덜렁이는 한순간의 희망을 비밀처럼 간직하고 있다. ‘상처허기로 가득한 생의 한가운데서 왜 나는 죽지도 못하는가?”라며 한없이 절망하던 그는 이제 그대로 주저앉는 대신 바닥까지 닿은 슬픔과 절망이 빚어내는 힘으로 이 세상을 견뎌나가야 하리라. 누가 뭐래도 시인이란,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의 삶을 사랑하는근성으로 똘똘 뭉친 존재가 아니겠는가?(박완호 시인)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해주는 불행처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우리가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속으로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카프카

이 마음으로 도끼와 더불어, 시와 더불어, 사랑하는 그대와 더불어, 영원히...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自序 중에서 )

 

 

 

운명은 제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제 의지로 죽어가는 새를 본 적이 있는가.

이빨보다 억센 부리를 굳게 닫고, 깊은

호숫가 검은 돌멩이보다 차갑게

제 그림자만 갉아먹던 새를.

 

아득한 창공에서 제 날개를 꺾어

피하지 않는 직선으로 추락하는, 끝내

머리부터 꽁지까지 층으로 짓이겨진 새를,

본 적이 있는가, 있는가?

 

그대는 본능보다 강한 의지를,

칼끝에 바람을 세우듯

제 의지를 시험하는 시인의 위태로운 날개

끝을 본 적이 있는가?

 

어두워라, 날은 개겠지만

무화無化되는 건

저 선연한 봄빛 미나리만은 아니리.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제 의지로 죽어가는 새를 본 적이 있는가.” 제 의지로 죽어가는 새는 바꾸어 말하면 제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는 새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인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저도 이렇게 모든 욕망 다 비워내고 제 의지로 아름답게 죽어가는 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제가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마지막 연입니다. 무화 되는 건/저 선연한 봄빛 미나리만은 아니리는 제 생각에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찬사, 일종의 보편성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운명이라는 개념이 필요했고요.

제 의지로 죽어가는 새를 본 적이 있는가는 부정의문문입니다. 저는 결코 본적이 없다는 것이지요. 새가 제 의지로 죽어가는 형상(자살)을 띨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의지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본능보다 강한 의지로 심지어 자기를 무화(無化)’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바로 운명보다는 제 의지로 위태로 저 자신을 몰고 가는 존재의 표상이 아닐까 싶어 써본 시입니다.

 

 

 

어떤 사람 이야기

 

착한 사람(남자, 서울생, 대학원졸, 흰 손)

한 평생 기운 창가에 앉아 시만 쓰다

죽었다. 사인은 아사餓死?,

오른쪽 머리통이 부어 있었다.

그는 한평생,

원한보다는 경멸의 대상이었으므로

그 골목 손수레를 끄는 노파들마저

살인을 의심하지 않았다.

굶어죽은 게 분명했는데,

유품인 검정 수첩과 다이어리 가득

당대 내놓으라하는 유명인 번호가 가득했으므로, 결국

근방 최고의 수의사가 부검을 했다.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폐와

위와 창자는 텅 비어 있었다.

-분명하게 사인은 아사餓死였다.

목젖 아래서 끄집어낸 성성한 댓잎 한 장을

칠순의 수의사는 깨끗하게 코팅을 했다.

역사를 위해, 집안의 가보로 공표해버렸다.

 

착한 남자는 조금씩 병든 나무들 사이에서

그 골목, 우체부가 지나갈 때마다

휘파람을 분다고 한다.

-아저씨, 제가 부친 시는 언제쯤

제게 돌아오나요!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참 아픈 이야기입니다. 실화를 시로 옮기신 것일까요? 시와는 별개로, 시를 읽는 독자들이 많아져서 문예지에서도 고료를 제 때에 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 실화일 수가 있나요? 실제 이런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저는 그 현장에 있지 않을 겁니다. 좀 구차하게 여러 번 말씀드리게 되는데, 저는 엄살이 심하고 이왕이면 죽었다 치고라고까지 슬쩍 밀어 즐기는 편입니다. 문예지가 아무리 많아지고 원고료를 제대로 지급한다는 조건 아래서도 제가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워낙 명망 있고 시고 산문이고 잘 쓰시는 분들이, 게다가 실력 있는 전업 시인들이 마구 등장하고 있기에 그런 좋은 세상은 저보다 후배 시인들에게 실현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사실 시대의 우화를 만들려다 실패한 경우인데, 다시 읽어보니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네요.

 

 

 

 

자화상1

-저기와 여기

 

저기서 나는 외팔이였다.

그 이유로

원추리, 칸나, 아네모네의 목을 꺾었다.

 

저기서 나는 외눈박이였다.

그 하나로

, 죄단 구멍, 생매장지를 파헤쳤다.

 

저기서 나는 언청이였다.

새는 발음으로

니체, 막스, 바르트를 외우고 다녔다.

 

저기서 나는 짝다리였다.

물론이다, 그 한 지지대로

기꺼이 무너지는 균형을 따라 기울었다.

 

여기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팔 둘, 눈 둘, 일자 입과 두 다리,

몇 날이 흘러도 멀쩡했지만

그렇게 온전한 나를

정상적인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

 

죽도록 심심했다.

심심해서 다 죽이고 싶은 한 마음만 자랐다.

 

그 맘에 치여 숨긴 반만 잃어버렸다.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저는 모든 시인은 외팔이, 외눈박이이며 언청이, 짝다리, 절름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불구를 사랑합니다. 세상과 완전히 섞여버리면 아무 것도 쓰지 못할 것 같아요.그렇게 온전한 나를 / 정상적인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 정상적인 시인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떠나간 것이겠죠. 떠나려면 떠나 가라죠. 시인들은 그 힘으로 시를 쓰니까요. 시인님의 자화상을 읽어보면, 기질상 시인 말고는 아무 것도 되시지 못하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시인이신 거죠.(웃음)

 

 

 

: 저는 거의 극단적으로 유폐되어 있어서, 사실 오래전부터 그래왔었기 때문에 일상인, 생활인, 혹은 시민이나 민중 등등 시인이 아닌 정의에는 무개념, 무덤덤합니다. 제 의도는 시인/시인 아닌 분이라는 구분에 근거한 게 아니라, ‘시인/(다른) 시인사이에서 자행되는 별의별 꼴 같지 않은 사태들에 대한 반발로 쓴 시입니다. ‘정상적인 시인들에 대한 공포가 이 작품의 계기입니다.

 

 

 

 

자화상5

 

햇빛이 없으면 나도 없다.

광목 기저귀 입에 빨며

덩그마니 큰방,

무서운 아버지 총 차고 나가고

가여운 엄마 호미 들고 나가고

형은 헌 책가방 챙기며

-, ,

왜 여기 비가 샜지?

그 비마저 없었으면 나도 없었으리.

머리맡 끝없이 스멀대던 거미처럼

난 들키지도 못하고

제 머리칼에 제 목이나 감는 존재.

제발, 저녁마다 취한 오발에 아무렇게나

한 발 맞아죽고 싶었던,

-기억은 죄악.

아아, 값없는 지친 연장의 날들.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시인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 서울 변두리, 지금은 송파구 풍납동으로 불리는 곳에서 태어나 몇 번 이사는 했지만, 방 한 칸 얻어 독립할 때까지, 그때가 삼십 대 중반이었는데 하여간, 줄곧 그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이사로 바뀐 지번보다 행정명령으로 바뀐 내력이 더 많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신장면 풍납리로 시작해서 서울시 성동구 풍납동, 서울시 강남구, 다시 송파구로 바뀌는 걸 죽 보았습니다. 아래로 다섯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바람드리라고 불렸는데, 한자 풍납(風納)’을 풀이한 것인데 저는 윗바람드리, 아랫바람드리 번갈아 이사 다니며 성장했습니다. 한강 변이라 장마철이면 제방에 올라 한강 물 구경하는 게 일이었고 실제 수재(水災)도 몇 번 겪었는데 참 축축한 기억입니다. 아주 궁핍하지도 않았고, 여유롭다 느낄 이유도 전혀 없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서민 집안에서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하게 착하지만 멍청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도 4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을 깨우치지 못해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몸으로 하는 심부름만 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특히 방과 후에는 늘 남아 교실과 화장실 청소를 도맡아 했는데 그렇다고 청결의식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버스는 중학생이 되어 처음 타 봤으니 서울 촌놈이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엄마가 있었다는 의미에서 안전했고, ‘한글(모국어)’을 읽거나 쓰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안정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오후

 

구룡계곡 그늘을 걷다

세 시간, 아니 반나절 햇빛을 피해 걷다

멍든 가슴, 돌팔매 당한 머리 치유하라, 걷다

그리운 이름 몇 앞세우고,

앞에 더러운 초상 몇 줄 세우고

무심히, 발길이 끄는 대로 무작정 걷다

꼼짝없이 서 있는 저것들,

내 나이쯤 되어 보이는 굴참나무들,

, 무릎을 꺾고 싶어

너도 쉬어야지

발등이라도 찍어버리고 싶어,

빈 주머니를 뒤진다. 손도끼 하나 챙기지 못한

미련한 시간,

이 게으른 정신이 순한 구름을 빚는다.

제길, 비 몇 줄기로 오늘을 대신하리라.

구룡계곡 그늘을 서성여도

용은커녕 뱀 대가리도 못 만나는

이 지독한 오류의 나날들.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용은커녕 뱀 대가리도 못 만나는 / 이 지독한 오류의 나날들.”시인님이 생각하시는오류의 나날들의 의미를 여쭙습니다.

 

: 용은 제가 용띠라서 흔히 사용하는 상징이고, ‘오류란 정상적인 경로가 있는데도 가지 못하는 경우를 지시하니, 시가 아니라 늘 다른 어떤 자리에서 안락하기를 바란 속내를 드러낸 것입니다. 스스로 오류를 거듭하고 있다는 자책입니다.

 

 

 

단단斷斷함에 대하여

 

정월, 영산홍

한 조각 붉은 마음[一片丹心]’, 어스름 밤하늘에

걸렸다. ‘모란이 필 때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나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들으며 자랐다. 목포는

친일파 아버지가 빨치산토벌하러 잠시 주둔했던

지중해보다 아름다운 남도의 항구, 항구적으로 난 피를

읽어내지 못하리라. 정월에 핀 영산홍, 내 친구 종선이는

광주 조대부고 출신 문학청년. 그 오월 내 생일**에 풋풋이

연모하던 이종사촌 누이를 잃고 시 대신 눈물의 일기만 쓰다

북한산 암벽 아래로 목을 꺾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얘기,

참새와 허수아비’***만 들리면 허수경의 ‘...감자의 시간’****

보면 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듣고 싶다. 아니다,

오장육부를 흔들어 따라 부르고 있다.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한 유달산에 정강이뼈 한 조각 파묻고 미친 척 한겨울

영산강을 건너고 있다. 겨울에 지는 영산홍, 춘향이보다

맵시 났던 내 엄마는 남원 향교동에서 자랐다는데, 광한루 앞

신작로 솜사탕 맛을 잊지 못하겠는데,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 ‘모란이 필 때까지얼마나 더 가슴을 쳐야 하나?

영산홍 피고 져도 영영 오지 않을 사람들만 늘어나는데

난 아직도 피를 읽지도, 생피 흘리지도 못하나 보다.

 

* 김영랑의 시.

** 518.

*** 조정희의 노래

**** 시집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시인님의 시를 읽고 울었답니다. 시인님에겐 왜 이리 아픈 사연들이 많으세요. 겉으로 허허허, 잘 웃으시는 성격 같으신데 그 웃음이 단단斷斷한 울음이었음을 알겠어요.

 

: 과장이십니다. 저는 1964년생인데, 베이비부머 세대에는 속하지 않지만 제 나이 또래에 아주 특출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 시에 드러난 정도의 아픔은 다 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건 개인의 사태가 아니라 역사와 시대가 만든 흉터입니다. 다만 제가 어떤 사건들에 대해 더 예민하게 감수성을 드러내고 집착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가*

 

정비단지,

공영주차장 후문 옆.

무단투기 된 건축쓰레기더미 그늘,

맨홀 뚜껑만한 웅덩이에서 며칠째

달큰, 시큼한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다.

약간은 출출하고 조금은 외로운

삼류시인의 낯붉힌 저녁 산책길에

생의 가장 황홀한 향기가 스며들고 있다.

하지만,

그 물빛에 얼굴을 비춰볼 순 없었다.

떨리는 곁눈질에 슬쩍 무지개가 묻어났지만

늘 웅덩이는 어둡고 고요했다.

구름 한 점, 나뭇잎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영혼의 밑바닥을 비유하면서

욕망의 끝물을 은유하면서

언제나 저녁 산책은 모던에서 로만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오르며 환하게 시작되고

 

오늘을 믿지 않는 나. 작은 용기로 솔직하자면, 오늘을 살고 싶지 않은 나.

골뱅이공습,어업94억씩피해,김성환후보작전주몰빵’,14배차익,바다이수만이등록금전액지원해줬다외래해충꽃매미대구도심습격,이용찬PO제외,급박했던두산의하루,유럽러시아,1000년만의강추위온다,“양심절임배추없어서못팔아요,류시원장동건줄줄이괴속스캔들,85만원수입화장품,원가는18만원?너무하네......,정말 너무하네!

오늘 밖에는 없는 나. 크게 허풍을 떨어보자면, 오늘을 지워버리고 싶은 나.

 

떨어져나갈 것처럼 저려오는 왼팔을 들면 그

서늘한 반원 속에서 퍼져나가는 노을.

구릉의 물매가 사라지는 거기,

기적처럼 연못 하나를 만난다.

가지런히 앃았을 크고 작은 돌덩이들, 함부로 나뒹구는

아아, 풀빛과 뒤엉켜 지극한 환을 뿜어내면

때 이른 안개에 휩싸여

약간은 출출하고 조금은 외로운

삼류시인의 저녁 산책길은 끝나지만

정말,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 문예출판사에서 번역 출판된 루 살로메의 소설 제목.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항상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에 골몰하던 아이였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시인님은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 각주에서 밝혔듯 루 살로메의 소설을 읽고 약간 감명 받아 쓴 작품입니다. 지금은 메르헨한 어휘만 남았네요.

어디에서가 시작의 순간을 지시하고, ‘어디로가 종말의 시점을 말한다면 전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제 경험이나 사유와는 무관한 무엇일 테니까요. 다만 어디에서를 유적 개념의 소속으로 이해해서 인간으로부터 비롯해서종말이 인간다운으로 마무리되길 바랍니다. 인간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최후의 심급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제가(제 시를 자전 해설하는 걸 극도로 꺼리는데) 마지막 두 행에서 던진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인간성을 가치의 기준으로 합당하게 세울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우리 시대의 시인

 

골목 입구,

허름한 호프집 삐걱대는 소파에 앉아

허리띠 풀고 구두는 벗은 채

검은 안경에 갇힌 흐린 시선만으로

시대의 사랑과 인생의 무상을, ‘아니지’,

짧은 선문답으로 설파하는 건

, 얼마나 쉬운 일인가?

 

오후 한 시에서 두 시 사이

테라스와 이국의 온갖 풍물로 장식된

찻집에서 끝내 곡차라 우겨

막걸리 한 사발 앞에 놓고

신고전주의에서 네오-다다이즘까지 줄

목숨 운명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름칠 번들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것 역시

, 얼마나 쉬운 일인가?

 

신새벽 갈증에 깨어나 고물 컴 다시보기

그 열광의 찬사를 흠모하는 건,

혀를 끌끌 차며 빨려들어가는 건,

욕하며 한수 배우겠다자꾸 결심이 서는 건,

그래도 삶은 살아봐야 한다고 질긴 맘

고쳐먹는 건,

, 얼마나 가려운 일인가?

 

긁을 때마다 살점이 묻어나고 핏기 서린

영혼마저 뭉턱뭉턱 뜯겨져 내리는

나는 금세기 최초의 문둥이

, 달에도 인간의 때가 묻었으니

저 멀리 목성 구름이나 뭉쳐 먹어야겠다.

유년의 달콤했던 솜사탕처럼,

더 달콤한 시라는 치클론*이라도.

 

* 치클론-B(Zyklon-B):나치 독일이 아우슈비츠에서 사용한 독가스의 이름.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시인님이 생각하시는 우리 시대의 시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요?

 

: 앞에서 시대착오적인 백인덕과 관련한 질문과 같은 범주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이 시를 쓰면서 지나간 시대의 시인이라는 정의와 시라는 개념에 의지해서 끊임없이 마치 시대를 재생하는 것처럼 낡은 테이프를 틀어대는 현상에 대해 극도의 반감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만 말씀드립니다.우리가 달라지면 당연히 우리 시대도 다른 형태로 인식되겠지요. 그 표현은 다른 어휘나 조어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고요.

 

 

 

난경難境 읽는 밤2

 

새벽, 헛기침에

괜시리 덧창을 연다.

겨우 산맥 하나를 넘었다.

차령이나 소백, 아니지

이왕이면 천산이나 히말 같은

사시사철 찬바람 부는 계곡을 품어 안은

새끼가 부화하기 직전의 매부리 같은

산맥 하나를 겨우 손끝으로 더듬어 넘어왔다.

-본질은 경험의 배면일 뿐인가?

시를 가르치며, 한없이 열리는 이 막막한

사막은, 목숨의 늪은 어찌 건널 것인가?

어려워라,

목숨이여, 시여,

손끝에는 밤새 더듬은 돌멩이와 풀뿌리,

길 아닌 것들의 실핏줄이 걸려 있다.

이제 곧,

건너편 담벼락 위로 실존의 해가 떠오르리라.

나는 유령처럼 밤을 건너 이제 곧,

죽으리라,

죽어야 하리라.

젊은 어미의 옷고름 같은 시구 하나,

풀지도 맺지도 못하고,

매어주지도 풀어주지도 못하고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 죽으리라, / 죽어야 하리라.” 시인님의 시에서 되풀이되는 구절입니다. 물론 시적 포즈임을 잘 압니다만, 왜 이렇게 시인님에게 엄격하신지요?

 

: 엄격이 아니라 엄살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서 비롯하니까요. 제가 시작을 좀 분기별로 나눌 정도가 되다 보니. 전 생각보다 과작이 아닙니다. 등단 30년에 6백 편 이상의 발표작이 있으니 분기를 좀 나눌 수 있다 싶은데, 이쯤에서 죽음은 사유나 시적 경지나 새로워지기 위한 제의적 희생, 말 그대로 표현상의 죽음이라는 것을 꼭 밝히고 싶습니다.나이 쉰 넘어 기저질환에 시달리며 실제 제 육신의 죽음을 희롱할 용기는 제게 없습니다.

 

 

 

백인덕 시인의 시집 단단斷斷함에 대하여를 읽는 내내 나로 하여금 생각을 거듭하게 했던 것은 이 시집의 제목이 내포한 역설적 의미이다. 제목에서 한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단단함굳다혹은 굳세다로 의미화되며, 한자 의 뜻을 의식하면 끊는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이 한자를 병기했음에도 이 이중의 의미를 다 포함한 제목으로 해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이 중년의 나이에 이르는 동안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단 한 번도 지워낼 수 없었던 유년의 기억과 상실, 그리고 순간마다 곧바로 어두운 과거로 새겨지는 자신의 현존, 이 모두에 대한 나르시스트의 지극한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시집에서 자주 발견되는 엄마에 대한 짙은 그리움은 시인의 존재론적 슬픔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엄마가 준 편지는 늘 푸르러서 / 열 수도, 찢을 수도 없어”(자화상5), “겨울에 지는 영산홍, 춘향이보다 / 맵시 났던 내 엄마는 남원 향교동에서 자랐다는데”(단단斷斷함에 대하여)와 같은 구절이 그것이다. 외팔이며, 외눈박이이며, 언청이며, 짝다리인 시적 자아에게 엄마는 그를 가장 온전한 존재로, 가장 사랑스러운 아이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이미 과거의 시간에만 존재할 뿐이다. 그 슬픔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 것일까? ‘모란이 필 때까지얼마나 더 가슴을 쳐야 하나?”(단단斷斷함에 대하여」‎)라고 토해낸다.(문학평론가 엄경희)

 

 

 

모르는 사이

 

누가 오지 않아도 밤은 깊어간다.

 

어둠에 압도당한 불빛, 밤은 깊이 웅크린 것들을 되살린다지만 아무 데나 가 걸리는 마음은 가변성(可變性) 좋은 병()일뿐, 계절은 저절로 돌아오고 모든 봄꽃은 자기(自己)의 완성을 위해 핀다. 예전에도,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얼얼한 손끝을 검은 자판으로 두드리며 먼 대륙, 찢긴 나라와 사람을 말하고 싶지만 거리(距離)는 거리에서 가늠될뿐, 골목 안에서 우는 고양이 털빛이 한밤의 모든 생각을 뒤집는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허기일까, 춘정(春情)의 시작일까, 잘못 든 길의 단순한 공포일지도 모른다.

 

누가 오지 않아도 저절로 깊어가는 밤은 낮은 곳에서부터 웬 고양이 울음에 찢길 것이다. 모르는 사이, 매장(埋葬)의 긴 행렬이 폐허를 수놓고 들뜬 상춘객 얼굴 달린 꽃잎보다 넘쳐도 더는 상상하지 않는다. 그저 모르는 사이일 뿐.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모든 봄꽃은 자기의 완성을 위해 핀다.” 공감합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것은 자기의 완성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꿈은 요원하여 이루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또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80대가 되어도 여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님은 일곱 권의 시집을 내시고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니, 어느 정도는 자신의 완성에 근접하신 것이 아닐까요?

 

: 숫자는 허상에 불과함을 잘 알고 계시면서? ‘자기완성은 상대성을 갖지 않기에 어떤 외적 상태에 의해 규정되지 않습니다. 저는 언어의 숲 가장자리만 맴돈 허기에 사로잡힌 또라이로서 필생의 시, 단 한 편을 향해 언제나 변방을 더듬을 것입니다.

 

 

산중음(山中飮)

 

산중에서 아주 헐벗은 산,

기왕이면

사태(沙汰)로 무너진 자국 아직 성성한,

그 자리만 시퍼렇게 탱탱 언 날

쩍쩍 들러붙는 입술에 연신

더운 침 바르며

독주 한 잔 마실 일이다

 

세상에는 세상의 이법

시에는 심법(心法)

심지에 불을 켜도

이 혹한에

날아가지 않는 새도 제 이유가 있는 법

 

깨진 돌 몇 개 끌어다

탑이나 하나 쌓고

산죽이나 떨기나무 시린 그늘과 마주앉아

독주(毒酒)나 한 잔 들이킬 일이다

비감해져

오장육부를 비틀다 차라리

개처럼 짖을 일, 제 기름진 허벅지나

물어뜯으며 낮달을 부를 일이다

 

술 몇 잔에

건너가지 못할 세상은

어차피

두 눈 부릅뜨고도 건너지 못할 터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 세상에는 세상의 이법 / 시에는 심법(心法)” 시인님은 어떤 이법으로 살고 계시며, 시인님만의 심법(心法)이 궁금합니다.

 

: 더는 물러설 데가 없네요. ‘세상의 이법은 물리법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의 바람이 총화로 묶여 각자의 욕망에 따라 배분되는 방식을 지시합니다. 반면 시의 심법은 종교나 철학이 아닌 시에서만 적용 가능한 심법으로 상상을 통해 분배와 양육을 마음대로 뒤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할 능력이 있다면 마음이 움직이는 바로 시를 쓰면 심법입니다. 누군 광기라 번역하겠군요.

 

 

 

북극권의 어두운 밤

 

누가 끄다 말았을까,

연기 그림자를 밀어 올리는 모닥불,

누가 애써 처박았나,

반쯤 익은 돌멩이 몇 개

기도처럼 혹은 낯선 인사처럼

주머니를 뒤져 메모 한 장을 꺼낸다

북극권의 밤은 시리지도 않고

오히려 투명하게 아프다

 

내가 읽는 이 시는 눈 빨간 여우와

굶어 죽은 그의 새끼들을 위한 것이다

다른 늑대에게 잡아먹힌 목덜미 흰

새끼의 어미 늑대를 위한 노래다

 

시린 뼈 하나 입에 물고

들짐승처럼 짖는 거다, 우는 거다

차가운 말씀이 온 거리를 단단하게 결박할 때까지

몸속 뼈를 하나씩 추려내는 거다

 

빈손의 피는 슬쩍 바지춤에 문대고 웃는 거다

웃음으로 울음의 아흔아홉 구비를 넘는 거다

 

누가 끄다 말았을까,

잡목 몇 개가 마지막 숨을 토하는 둥근 모닥불 앞,

오래된 책가방을 내려놓고

글자가 끊어지는 볼펜심에 연신

마른침을 바른다

 

내가 쓰는 이 시는 지독하게 어두운 밤의

송가(頌歌).

그래도 새벽은 밝아오겠지?

그래도 더 차가운 새벽은 밝아오겠지?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 시린 뼈 하나 입에 물고 / 들짐승처럼 짖는 거다, 우는 거다 / 차가운 말씀이 온 거리를 단단하게 결박할 때까지 / 몸속 뼈를 하나씩 추려내는 거다몸속 뼈를 하나씩 추려내며 들짐승처럼 울음 우신, 차가운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에서 시인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을 여쭙습니다.

 

: 감정이입이지요. 아니 생명의 연대, 혹은 다를 게 하나 없는 원시적 생태에 대한 저 나름의 찬사지요. 아시지요, 시인의 의도란 것이 시적 지향과 꼭 같지 않을 수도 있고 따라서 그 입에서 듣는 말이란 결국 하나의 뜬소문과 같다는 걸요. 모든 생명은 다 같은 경로를 가졌다, 더는 잘 모르겠네요.

 

 

: 오민석 선생님. 박완호 시인님과 자주 회동하시는 것 같습니다. 만나면 어떤 얘기를 나누시는지요? 세 분의 연대감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 꼬리를 문 뱀처럼, 연대감은 말하자면 자꾸 길어지니 생략하기로 하고, 회동하는 이유는 가까운 데 살고 별로 다툴 일도 없고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무엇보다 만나면 재밌으니까 아닐까 싶습니다. 오민석 시인에 대해 누가 뭐라 해도 저한테는 그저 1년 먼저 등단한 가까운 선배일 뿐입니다.

 

 

 

그동안 너무 게을러서 나는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다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경험의 반란

 

서너 정거장 앞서 밀려 내려가는

먹구름

 

텅 빈 버스는 자꾸 흔들리고

무거운 책을 펼치며

좌석 깊숙이 몸을 찔러 넣지만

중력은 내 무게를 하찮게 여긴다

 

세계는 질보다 양

깊이 아닌 빈도

신민(臣民)은 없는 벌거숭이 임금들

 

격자 유리로 차단된 흐린 공간에

빗방울보다 먼저 떨어지는 선율,

알 듯 모를 듯

아예 닿아본 적도 없는 듯

기억은 잿빛으로 가라앉는다

 

길은 자꾸 버스를 털어내려 하는데

앞장선 먹구름 따라 밀려 내려가는

영원의 오후

 

살아있지만

증명할 수 없는

잠깐,

먹구름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 우리 모두는 살아있지만 / 증명할 수 없는 / 잠깐, / 먹구름이라는 생각입니다. 돌아가신 분을 떠올려보면 그 분이 살아계셨었지만, 어느 날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버려서 정말 그 분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을까, 의구심마저 듭니다. 비와 우박과 천둥, 번개를 동반한 먹구름이 우리 존재의 실존적 모습이겠지요. 저는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시인님은 어떠하신지요?

 

:전 여한은 많습니다. 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더 해야 한다고 의무감 비슷하게 자신을 마취시키는 것도 좀 있고 비행기 타고 외국도 한 번 못 가 봤으니 그런 것도 좀 해야겠고, 실존에 앞뒤를 자꾸 갖다 붙이면 실종이 됩니다.저는 그냥 앞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자의적인 해석을 붙이는 걸 경계할 생각입니다.

 

 

항복

 

혜안(慧眼)을 쓰고

해안이라 읽는다

 

애인이라 소리 내지 못하고

영원을 적는다

 

발밑 새를 검게 옮겨

모서리 벽에 박아버린다

 

먼지가 점령한 거리

나는 어느 별의 먼지인가?

 

서걱대는 분절(分節)의 구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멀다

 

통화를 하거나

연신 침을 뱉거나

하얀 마스크로 가린 눈빛

 

갑자기 부은 목이 메는

나는 어느 죽은 별의 먼지였나?

 

행복(幸福)을 쓰고

항복이라 읽는다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 행복(幸福)을 쓰고 / 항복이라 읽는다그렇습니다. 저도 많은 것을 포기하니 오히려 덜 불행해지더군요. 아니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살아오시면서 어떤 것에 항복하셨는지요? 항복하셔야만 했는지요?

 

: 제 작품에서 이런 방식의 비틀기는 자주 등장하는 편인데, 순전히 개인 서사로는 일종의 열패감 표현에 지나지 않고,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긍정성, 투명성에 의지해서 떠들어대는 행복이 무슨 행복이냐, 그건 항복했다는 아우성, 잘해야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좀 뒤틀린 심사의 고백입니다. 저는 무엇에도 행복을 느끼고 누리려 해본 적도 없고, 사실 무엇에 심각하게 항복했던 적도 없습니다.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시적 엄살이지요.

 

 

: 현재 운영하고 계신 유튜브 화이트훅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요?

 

: 유튜브 채널은 술 먹고 알딸딸하면 하도 시끄럽게 오래 이것저것을 떠들어대니 집사람이 견디다 못해, 좀 체계적으로 떠들어보라고 만들어 준 것입니다. 원래 목적은 시와 관련한 것 말고, 문화 일반에 대한 재밌는 접근을 시도하려 했는데 천성인 게으름 탓에 개점 휴업 중입니다. 조만간 활성화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로 잔뜩 꾸며 볼 생각입니다.

 

 

 

: 현재 계간아라문학주간, 월간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편집위원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이 두 문예지는 각각 어떤 성향의 문예지일까요?

 

: 아라문학은 인천 지역에서 문예 협동조합 형태로 시작된 모임에서 비롯한 계간지입니다. 지금은 막비시동인이 발행 주체가 되어 계간 형태 책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저는 주간으로 막비시 동인들과 외부 필진 사이의 균형 및 가교 역할과 잡지의 성숙을 위한 조언 정도만 참여하고 있습니다.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에서는 7~80년대 선배 시인들 청탁과 연재 코너 중에 <희망에세이>를 집필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 11김구용시문학상’(2020)을 수상하셨습니다. 어떤 기분이셨을까요?

 

: 이번에 발간한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문학의 전당, 2020)으로 계간 리토피아가 주관하는 제11, ‘김구용시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무엇보다 제가 아는 김구용 시인이 한국시를 현대화하고 시적 사유의 깊이를 더한 분이시고, 제 스승 이승훈 시인이 존경하던 분이었다는 점에서 무척 기쁩니다. 시력(詩歷) 3십 년이라 쉰내가 진동할 텐데 기꺼이 심사하고 또 선정해준 선생님들의 일종의 용기(?)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을 지경입니다. 개인적으로 상 받은 기쁨의 유효기한이 이미 지나서 지금은 그냥 닥쳐오는 소소한 원고의 마감에 헉헉대고 있습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부담감도 좀 있지만, 시작(詩作)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뼈아픈 근황

 

서 있는 내내

번갈아 저리는 다리

두 눈 꾹 감고도

추억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무작정 내린

낯선 지명의 구도심

 

지하에도 지상에도 즐비한 곡()소리

자진폐업, 임대문의, 점포정리, 핵폭탄세일의

반투명 유리벽을 유람하는데

순간 눈길을 확 당기는

붉고 정갈한 서체

-폭망,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불타버리는 게 낫다는 듯

요절인 듯

절명인 듯

해 질 무렵 거리에 차가운 불을 뿜는다

 

저린 다리를 잊고

찬 불에 움츠러들어

폐업 직전의 정신을 곰곰 헤집어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망각의 기술,

예상 표절

 

슬픈 눈빛으로 오가는 짐승들 사이

딱딱한 목 뒤에서 기어이 틀어지는

억센 뼈 하나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 일 곱 권의 시집 외에도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을 출간하셨습니다. 독자들이 종이로 만들어진 책보다 전자책을 선호하는 경향이 날이 갈수록 두드러지는 이즈음,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은 어떠하며우리들은 어떤상상력을 지녀야만 이러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 이 책은 사이버라는 용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난 세기말과 21세기 초의 글쓰기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시적 인식의 변화를 살펴보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가상현실이나 증강현실이 인구에 회자 되고 있으니 구닥다리도 아주 구닥다리인 셈입니다. 그 책에는 학진에 등재된 논문과 기타 세미나에서 발표한 소논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인의 상상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시인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봤습니다. 지금 AI가 시 쓰기에 적당한 옵션만 제공하면 불후의 명작이 탄생하는 상황에서는 쓸모를 다했지요. 제 꿈은 이론적으로 고민하면서 창작으로 해소하려 했는데 폭삭 망했습니다.

 

 

 

: 시인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확장하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 자리를 마무리하면서 독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나 시인님의 문학에 대해서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실까요?

 

: 좀 더 발랄하고 생기 찬 시를 쓰고 싶습니다. 정말 생명의 환희나 시간의 변화에 따른 기쁨 등을 써보지 못했으니 이제는 기쁜 시를 열심히 쓸 생각입니다.독자야 자기 취향에 맞게 시를 읽으면 되는 것이고, 저는 제 시의 독자를 상상할 수 없기에 특별히 덧붙일 말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The Self)’로부터 출발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직접적 경험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시로 하여금 한 시대의 어두움을 비추는 시대적, 실존적 역상(逆像)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게끔 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는 그의 시편을 통해 구체적 시공간에서 빚어진 사람살이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접하게 되고, 속도전과 폭력성에 의해 밀려난 어떤 경험적 실재들을 어둑한 풍경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해설 중에서, 유성호 문학평론가)

 

 

늦여름

 

늦여름

다시 찾아온 장맛비는

머리맡을 적시고

꿈은

봄날이나 가을과도 같이

스멀대는 약 기운으로 풀리는데

아아, 자꾸 말을 잃어버려

번개 치듯 나는 당신에게로

건너가고 싶지만

이 생을 저 생으로 옮기고도 싶지만

늦여름,

가만히 내 이마에 튀는 빗물은

아니라 하네. 글썽한 눈으로

아직은,

아직은 아니라 하네.

 

- 시집단단斷斷함에 대하여중에서

 

 

 

요즘 개

 

개가 개처럼 짖지 않는다.

 

간혹,

새벽길에서 마주쳐 입 모양으로 욕을 하거나

주먹 흔들어 때리는 시늉을 해도

멀뚱멀뚱

 

내 행색을 읽었나,

간식을 안 바쳐 무시하나

별별 생각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길 한가운데서 어슬렁거리며

연신 코를 들어 허공을 킁킁댈 뿐,

고양이화 되지 않은 건 분명한데

요즘, 개가

개처럼 짖지 않는다.

 

줄창 뉴스만 틀어놓은 식당 앞을 어슬렁대더니

중독된 게 분명하다.

 

지가 주인인 세상

나를 가여워할지도 모른다.

설핏 걱정 끝에

꼬리뼈가 슬그머니 처진다.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시인은 시 속에서, 자주 죽고 싶어 한다. 이는 삶에의 강한 의지이다. 순수한 영혼의 시인은 자신이 잘 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진실한 삶에 도달하고자 하는 이일수록 죽음에 대한 유혹 또한 크다. 그것은 자신에게 엄중한 사람일수록 더할 것이다. 시인은 시인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부족함 없는 사람이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순결하게 살아내기를 바란다. 더할 나위 없이 이미 그렇게 새하얀 눈처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어둠을 정면으로 치러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끔찍하리만치 성실하게 시를 살아낸 시인이 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다. 이제부터 진정한 시작이다. 나는 시인이 개가 개처럼 짖지 않는세상을 향해 보다 큰 울음으로 짖어주기를 바란다. 밀어내는 힘과 /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담장 밖에서

밖으로만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는 안다.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

키 작은 관목조차 알고 있다.

시간은 철갑(鐵甲)을 둘러주거나 석회질 외투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님을.

 

밀어내는 힘과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금은 이내 상처가 되고

상처는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를 뿐이란 걸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 시집북극권의 어두운 밤중에서

 

 

 

 

<백인덕 시인>

1964년 서울 출생

한양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1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끝을 찾아서, 한밤의 못질, 오래된 약, 나는 내 삶을 사랑하는가, 단단함에 대하여, 짐작의 우주, 북극권의 어두운 밤등과 저서 사이버 시대의 시적 현실과 상상력등이 있음.

11김구용시문학상수상(2020)

현재 계간 아라문학주간, 월간 웹진공정한 시인의 사회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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