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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 외 9편/ 박미산

이경애 기자 | 입력 : 2021/03/25 [11:49] | 조회수 : 953

 

 

 

 

 

 

 수제비

 

 아흔 아홉 칸 태양 단 한 칸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강화 바다는 저물녘 해의 흡반이다, 저무는 세상, 속도는 빠르고 점차 보이지 않는 바다, 작아지다 없어지는 그림자, 올 한해는 영원히 동면이다, 먼저 떠난 친구 오랜 잠에 취한 눈 비비며 고향바다에서 걸어 나온다, 연탄화덕에서 끓고 있는 팽팽한 삶, 양은냄비에 악착같이 달라붙던 가슴의 녹물, 뼈 속 깊은 허기를, 지문 없는 손으로 뜯어 넣는다, 수제비 동이는 비어가고 한 칸을 마저 채워 잠시 호사했던 그녀, 삶의 소릿결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밀물의 신호음 따라 서둘러 아들을 등에 업은 그녀, 물수제비뜨며 바닷길을 간다.

  

 

괭이부리는 똥마당을 로딩하고

   

나에게 전송된다

한 세기에서 다음 세기로 넘어가는 동안

똥마당이 괭이부리였다는 것,

나를 기억하는 사람도

내가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졌다

 

영승이가 밀물져온다

저목장貯木場에서 나무껍질을 벗기던 그 애가

젖은 통나무 사이에 빨려 들어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했을 때

1965년 비겁함을 바다에 내던졌다

 

일몰을 찍는 사람들은

바다에 떨어지는 내일을 분할 중이고,

목재공장의 크레인 소리를 입에 문 갈매기는

무례한 옛날이야기를 로딩하고,

하꼬방에서 아파트로 전송은 이어지고,

 

통나무를 가득 실은 바지선이

아파트 사이로 지나간다

빨간 눈의 영승이가 나를 부른다

 

 

헤어지는 방식

 

당신의 새빨간 뒤통수가

떠올랐다 잠기는 동안

각혈하던 시간들이 흩어진다

하얀 병실에서 나를 기다리던 당신

아니,

나보다는 담배를 더 기다렸지

엄마 몰래 담배를 맛있게 빨던

당신의 봉분을 베고 눕는다

담뱃불이 새빨갛게 타들어간다

골동품처럼 어두워진 애기봉에서

아카시아 꽃일들이 쏟아진다

쏜살같이 퍼붓던

달변인 당신처럼,

헤어지는 이의 방식을 몰랐다

유독 나에게 미안해했던 당신이

임종을 앞두고 쏟아 붓던 말

차가운 년,

못된 년,

 

검은 바다는 입을 꿰맨 채 달려온다

미끄러지는 욕을 달고.

 

 

심장과 바퀴

 

늑대의 시간에 도착한 타국에서

화석이 된 당신

길 잃은 당신에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짖어대고

 

속이 타버린 당신이

내 자전거 뒤에 올라탑니다

잔세스칸스 풍차 마을을 지나고

(풍차는 돌지 않습니다)

튤립 마을을 전속력으로 달립니다

(노랑, 빨강, 하양, 튤립이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스스로 굴러가본 적이 없는 당신

언제까지 가야 할까요?

만국 평화는커녕 가정의 평화를 위해

수로에 처박고 싶은데

(레이스 달린 하얀 꼬깔 모자를 쓰고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지나갑니다)

 

절망이 한 방향으로 굴러갑니다

갈고리발톱으로 나를 헤집는 당신

기어코 바퀴 하나가 터집니다

 

한 손에는 펑크 난 바퀴

또 다른 손은 펑크 난 심장을

핏발 선 하늘에 힘껏 내던집니다

 

낙처를 찾지 못하는 심장과 바퀴 

 

 

명옥이라는 이름 

  -인일여고 동창회

 

바람이 머리를 열고 닫아요

교복 치마가 매끈한 뇌를 덮어요

피고 지는 아카시아 꽃잎 매립지에서

그녀들이 버렸던 얼굴이 불쑥 솟아요

 

명옥이를 부르면

셋이 똑같이 뒤돌아봤어요

아카시아꽃처럼 몽글 몽글 웃으며

손뼉을 마주쳤지요, 하이파이브

열 번 스무 번 맞댄 손을 놓지 않을 줄 알았어요

깍지가 풀리고

달력을 넘기면서 이름을 서랍에 구겨 넣었어요

 

걸으면서 달리면서

조명옥은 학교에서

안명옥은 병원에서

주름진 발자국을 찍으며

새 길을 만들었어요

우리가 누구인지

생전 처음 보는 얼굴로 바뀌고

 

뱃고동소리가

자유공원의 맥아더가

뒷동산의 아카시아가

실로폰 소리처럼 튀어 오르던 웃음이

수줍고 청결한 페이지를 읽던 둥그런 교실이

우리를 보관해놓았나 봐요

 

그녀들은 구겨진 뇌를 열고

서로를 바라봐요

옛날에 늘 보던 아카시아 교지처럼

명옥이를 읽는 겨울밤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이야기 끝자락에 달라붙어 있던 고드름이

되돌아오지 않던 얼굴을 깨고 있어요

부서지고 씹히며 드러나는 그녀들, 하이파이브

따뜻한 손을 잡는데 40

 

너무 짧은가요

 

 

 복미식당 주방장

 

 밤새 어깨를 나란히 한 뼈다귀들이 뜨거워집니다 반쯤 얕아진 육수 위에 한쪽으로 고이는 기름, 죽도록 뜨거워진 뼈와 기름을 건져낸 자리에 그가 채워집니다 대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주방, 그는 폐가 뜨거워 뜨거워하다가 8월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새벽마다 함께 냉면발을 뽑아내던 나를 두고서

 

 살점이 다 빠져나간 뼈다귀가 앞으로 굴러옵니다 내 몸을 뚫고 다정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손바닥에서 뛰는 폐를 찬물에 헹굽니다 냉면발은 질긴 것인가, 고향으로 배달하러 간 그에겐 쉽게 끊어졌지만, 나에겐 질기기만 합니다 뼈만 남은 구순의 내 손에 사리들이 길게 말립니다

 

 어느덧 사리가 된 내가

 

 한겨울까지 질기게 매달려있습니다

 

 

외간남자 

 

오늘도 실버타운에 전설이 내려 쌓인다

 

왜 내 몸에 손대세요?

아들 손을 탁 치는 여자

 

함경도 끄트머리 단천 역에서

언니를 기다리던 아이 목소리이다

 

소설가 언니 가방에서 나오는 초콜릿을 보고

복숭아빛 목소리가 터졌던 그녀

 

초콜릿을 입에 넣어주는 손녀 품을 파고든다

언니, 이 남자 누구야?

 

족보를 잃어버린 그녀

머리 텅 빔이 부럽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그 여자가

남자 손을 잡고 눈자위를 옭아맨다

 

아들 눈에선 철 지난 벚꽃, 진달래꽃이 후두둑 떨어지는데

여자 마음엔 연분홍, 진분홍 꽃들이 화르르 피어난다

 

핏빛 눈물,

핏빛 꽃길,

제각각 핀다

 

 

 

 

  

 

백록담  

-정지용에게  

 

 말없이 올라가는 내 등짝에 칼을 꽂았다 너는 주저앉는 나를 보며 사라졌다 바다가 구길 때 나는 소리와 함께 펑펑 내리는 눈사태를 따라 행간의 넓이는 죽음처럼 더 깊어졌다 눈덩이로 몸을 씻고 기진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흩어지는 너의 씨알들을 산채로 가두어두고 간격이 벌어지지 않게 배열하고 고정시켰다 날 선 칼바람이 나의 말을 베고, 짓눌린 글들은 백화나무 위에서 뚝 뚝 부러졌다 엄고란 고비 고사리 뻐꾹채 꽃밭을 찾지 못한 난 내려갈 수가 없었다 별과 같은 방울을 달은 고산식물을 찾으며 정상을 향해 기어갔다 푸르고 시린 백록담에 나의 일곱 번째 등뼈를 비스듬히 걸쳐놓았다 내가 죽어 백화처럼 흴 것이 숭없지 않다 네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목구비도 만져보지 못했다

 

 

 

 

 

 

 

 

 

 

 

  

 

진흙 오리

 

북경 진흙 오리구이 집, 치엔쥐더(全聚德)

 

진흙 속에서 오리는 두 날개 접힌 채, 숨도 미동도 없이 커다란 접시위에 미끄러져 내 앞으로 왔다 여덟 살 , 내 뒤를 따라다니던 새끼오리를 밟은 적이 있다 내장이 튀어나왔는데도 죽지 않고 나를 바라보던 오리, 나는 그 오리 눈빛을 잊어 본적이 없다 오리들은 나를 빙 둘러 가둬놓고

 

허기진 입술, 참나무 장작 냄새, 춘장과 파, 얇은 밀전병, 달그락거리는 수저와 식기가 어우러진 구수한 분위기인 치엔취더, 손을 뻗자 황토빛 날들이 깨지고 새끼 잃은 어미오리가 물갈퀴를 펼치며 내 눈앞으로 날아왔다 해방촌 언덕길 아득하던 그 시절에 갇힌 나, 빠이주는 엎어지고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 종업원들은 나를 빙 둘러 가둬놓고

 

 

 

아르고스의 눈  

 

삐삐 경보음이 울린다

흰 가운을 입은 약사가 묻는다

외국에 다녀왔느냐고

 

체스넛트리 카페*에 한구석에 앉았다

맞은편 벽에서 누군가가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커피를 다 마시지 않고 도망치듯 나왔다

누군가 뒤따라온다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다

 

샤워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아르고스의 눈이 계속 뒤쫓고 있다

 

병원 약국 카페 거리 뒤돌아본 것 까지

낱낱이 적혀있는

문자가 온다

 

백 개의 아르고스 눈이 노려보고 있다

아르고스의 목을 베어버릴 헤르메스는 언제 올 수 있을까

 

갈대 피리를 불어야겠다

 

 

* 체스넛트리 카페; 조지오웰의 1984에 나오는 카페

 

 

 

박미산 시인

2008세계일보신춘문예 시 등단

2012년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루낭의 지도(2008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태양의 혀(2014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2020)

201411월 조지훈 상 수상

현재 방송통신대학교 출강

20176~현재까지 세계일보》 「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연재 중

20212~현재까지 환경미디어》 「박미산의 시시닷컴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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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ounsc 2021/04/02 [18:46] 수정 | 삭제
  • 박미산교수님 반갑습니다.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서 교수님 강의를 듣었던 사람입니다.교수님의 이름을 본 순간 수업시간에 들었던 많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제게 시를 더 많이 쓸 수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교수님글을 읽고 또 읽어봅니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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